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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그리스도의 연합 사상

웅대한돌산 2012. 11. 6. 18:35

바울의 그리스도의 연합 사상

제3장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

 

1. 본 주제에 대한 바울의 다양한 표현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묘사함에 있어서 바울의 가장 즐겨 쓰는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 라는 표현이다. 다이스만은 (Deissmann)은 이 문구가 164회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전존재를 이 짧은 문구 가운데 포함시키는 것이 얼마나 용이한 것이었는가를 지적해 주기에 충분하다 이 표현은 바울에게는 하나의 습관과 같이 사용되던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하여 가지는 핵심적인 의미이다.

(1)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화목하게 하시며”(고후5:19) 부활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이시며(롬8;11)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존재 사이에는 분명 어떤 대비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이셨으며,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이다.

 

(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그리스도안에 있는 표현의 가장 근접한 말씀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17)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빌3;9)간절한 소원이라고 한다. 바울은 아담과 우리들의 관계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으리라는 사실에 비추어 이해하고 있다.“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함을 받았다.”(엡1;4) 또한“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이었던 우리는”(고전3;1)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엡4;15) 것을 명받고 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처럼 그들은 “그분 안에서 ”죽는 것이다(살전4;16)

(3)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바울은 종종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서의 전체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회중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안하며 축복하고 있다.(살전1;1;빌1;4)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1‘1 ; 빌1;1)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유”에 대하여 논의할 때 분명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다.(갈;2;4)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몸이라고 말하고 있다(롬;12;5)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는 사회적인 차별들이 교회의 존재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갈3;28)

 

(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존재의 당연한 결과임을 강조하는 구절들을 발견하게 된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고전1;2)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갈2;17)

“주 안에서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고전7;22)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다”(고후5;21)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빌4;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된다”(엡1;12)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다”

(엡1;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갈3;26)

그리고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부여되는 것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이다.(갈3;8)

 

(5)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활동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고 실행의 전체 영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가운데 포함되는 것으로 신자의 말, 그의 생각, 소망, 관계, 태도, 그의 전체적인 생활양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존재 내에 놓여 있다.

남자는 주 안에서 여자와 결혼한다. (고전7;39)

그리스도는 주 안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인을 영접한다. (갈5;10 ; 빌1;14)

우리의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명명백백하다(고후1;19)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하다(고전1;5)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다(고전4;10)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다(롬16;10)

우리의 전체적인 생활양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다. 우리의 삶의 방식, 역동력, 관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분 또는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도

바울은 자신의 행동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도로서의 행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자신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회 고인들에게 영적인 아버지가 되었음을 주지하고 있다(고전4;15)

그는 디모데를 주 안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다(고전4;17)

그는 주 안에 있는 사도로서 다른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자랑하고 있다(고전15;31)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 말씀하신 것(고후13;3) 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후2;17 ; 롬9;1)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수고한다(빌2;1)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힘쓴다(고전15;58 ; 롬16;3, 9, 12)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한다 (빌3;1 ; 1;4 ; 4, 10)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바란다(빌2;19)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나(고후13;4),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을 소유하며(빌4;13)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다(고후 2;14)

그는 모든 행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고전4;17)

그는 그리스도 안에 매인 자이다(빌1;13)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하며(몬8)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다(고후1;21)

바울은 어떤 때는 “주 안에” “ 그리스도 안에 ” 다른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고 말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한번 사셨다가 사라져 버리는 신인(God-man)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는 것이다.

 

 

 

2. 바울의 주제에 대한 다른 세 가지 신학적인 견해들

 

웨스트코트의 견해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의 신비와 의미의 핵심의 내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시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분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나 한 것처럼 불쑥 그러한 문구를 제시하고 있다.

이 문제의 해답을 알기 위해서 두어 가지 “그리도 안에” 신학들을 살펴보고 내가 제시하는 세 가지 신학의 범주들은 대략적인 것들이 될 것이나 바울의 복음의 열쇠가 되는 주제를 이해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얼마나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1) 신비주의적 연합

첫 번째로 신비주의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해석에 있어서 두 종류로 구분한다.

①도덕적 신비주의와 ②존재론적 신비주의가 있다.

①도덕적 신비주의

다이스만은 바울이 “안에” 라는 단어를 도덕적 인격체와 더불어 사용한 선구자이다.

즉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특정한 장소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며 그 장소는 예수 그리스도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도덕적으로 반응한다.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도덕적 인격체로서 예수님의 존재와 우주 전체에 걸친 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들에게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분으로 만든다.(어렵다)

②본체론적 신비주의

마스칼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한 인간의 삶에 너무나 큰 변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본체론적인 변호라 부른다.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피조물의 위치에서 들어올려져서 하나님의 생명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 안에 일어난 그 본체론적인 변화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누리게 되는 지위를 공유할 자격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본질에 의해서, 우리는 은혜에 의해서 그것을 향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신성화된 인간적 생명(the divinized human life of Christ Himself)과 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은 교회 안으로 연합됨을 의미하며 교회와 그리스도는 본체론적으로 하나이다 따라서 교회가 부여하는 생명에 참예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예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예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예하는 것이다.

 

(2) 행동이 있는 곳(행동의 좌소)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 두 가지 신비주의 적 해석에 대해 다이스만과 같은 도덕주의적 신비주의해석에 있어서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는 성령 안에 있는 도덕적 변화와 파스칼과 같은 본체론적 신비주의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는 ‘교회 안에’ 있는 본체론적 변화를 보았다.

바르트(Karl Barth)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행동이 계속되는 존재를 의미한다. 바르트에게 그리스도의 실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말한다. 바르트에게 있어 그리스도 안의 존재라는 것은 행동과 상응한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 공간적으로 존재하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 단순히 나란히가 아니라 동일한 지점에 -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거기에는 본성의 혼합도 신성에의 참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주로서 행하시고 있는 영역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르트의 견해의 핵심이다.

성례주의자는 그리스도 안의 존재를 강조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의 행동을 강조한다.

성례주의자는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참예함에 의해 신성화된다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참예함으로 섬김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성례주의자는 인간이 세례의 의식에 의해 그리스도 안으로 이르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의 소몀에 의해 그리스도 안의로 이르게 된다고 한다.

성례주의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목적은 모든 생명의 초자연화와 신성화(super naturalization and deification) 라고 말하는 반면

바르트는 그것이 피조물과 그의 주 사이의 목적과 바람의 일치(unanimity of purpose and desire between the creature and his Lord) 라고 말한다.

성례주의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례전(sacrament)이라는 표제하에 쉽사리 논의할 수 있다.

바르트는 그리스와의 연합은 소명이라는 표제하에 논의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바르트의 생각과 성례주의자의 생각 간에 이런 뚜렷한 대조에 우리는 각주를 덧붙일 필요가 있다.

두 가지 생각에 두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에도 이 두 가지 생각에 흥미로운 접촉점이 있다.

성례주의자는 전체 피조물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으로 고양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바르트도 마찬가지다.

성례주의자는 피조물로서 인간 존재의 통일성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희생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바르트도 마찬가지다.

성례주의자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이 생명의 전체적인 구조 내의 실존으로 이해되기를 원한다.

바르트도 마찬가지다.

성례주의자는 입장에는 인간이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떤,것 즉 그리스도에 의해 제공되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강한 암시가 나타나 있다.

바르트 역시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성취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양자에 있어서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그 시작부터 피조물에게 있어서 필수불가결 존재이신 것이다.

 

(3) 새로운 상황 안에 있음

필자가 논의할 “그리스도 안에” 존재에 대한 해석은 상황 주의적 기독론(Situationist Christology)과 조화를 이룬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창조되고 그분의 영을 통하여 존속되고 있는 새로운 역사적 질서 안에 것을 의미한다.

장소의 문제(The question of where)는 방도의 문제(the question of how)만큼 중요하지 않다.

그 강조점은 그리스도께서 좌절과 패배의 권세들에 대해서 거두신 승리에 있다.

그가 그분의 영을 통하여 지상에서 행사하시는 현재적인 그리스도의 주권에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 있는 것이며, 자유케 하시는 성령님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 된다.

 

3. 바울의 견해에 대한 집중적인 고찰

 

(1) 그리스도 밖의 생명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한 가지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 밖에 잇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바울사도께서 그리스도 밖의 생명을 묘사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단어들은 “육신“ ”율법“ ”죄“, 그리고 ”사망“이다. 이것들은 서로 얽혀 있으며 상호의존적이다. 바울사도가 그리스도 없는 삶의 허망함이 절망적인 상황을 포착하는 언어적인 그물(verbal net)인 것이다.

육신 안의 삶

바울사도가 사용하는 “육신”이라는 단어에 대한 명확하고도 단순한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실망할 것이다. 바울사도가 사용하는 “육신”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 언약한 육신 ; 육신적인 인간은 가시로 인하여 고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며, 역설적으로 감사함으로 그것을 받아들임으로 자신의 강함을 발견한 사람이다. 고후;12;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는 병이 들고 죽는 인간이다. 갈라디아서4;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고전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육신은 인간성을 뜻한다. 그것은 그 존재에 하나님의 지속적인 생기를 불어넣으심이 필요한 인간들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숨을 거두어 가시는 그 순간에 육신은 멸망하고 만다. 우리는 육신으로서 언제나 무의 벼랑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자기를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과 동일하다 육신으로서의 하나님의 피조물이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것은 육신적 존재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 죄로서의 육신 ; “육신 안에” 있다는 것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는 반대가 되지 않는다. 바울은 그와 동시에 “육신 안에”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 정 반대 편에 서 있는 것과 동일한 범주에 두기도 한다.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롬8;8) “육신 안에”라는 말은 그리스도 밖을 말하며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님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님을 거스리며(갈5;17) 육신대로 사는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롬8;13)

육신 안에 있다는 것은 한 인격체가 죄로 가득차고 정죄 받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육신은 구속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삶을 풍자하는 말인 것이다.

 

율법 아래서의 삶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경쟁자로 등장하고 있다(갈5;4) 율법에 대한 바울의 근본적인 논지는 그것의 때가 마쳤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시기 때문이다(롬10;4)

율법의 경우에 있어 바울이 결함을 발견했던 것은 율법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이 종교적인 공동체 내에서 차지하는 기능이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기본적인 태도는 긍정적이다.

율법의 내용에 관한 한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롬7;12)

율법의 내용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한다.

율법 아래 잇는 자들은 저주 받은 자들이다.(갈;3;10)

그리스도 안에서 볼 때 율법은 악한 것이다,

그것은 감옥이며 영적인 굴레의 습기찬 지하 감옥이다.(갈3;22,23)

바울 사도가 율법 안에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파괴하시고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은 정사와 권세(골2;15)에 대해 거두신 승리이다.

율법은 육신과 더불어 죄를 산출한다.

또한 죄의 마침은 사망이다. 이것이 바로 연합의 재난이다.

육신에다 율법을 더하면 그것은 사망이다.

왜냐하면 육신과 율법이 결탁하여 인간들을 죄 가운데 유기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죄와 사망의 법”(롬8;2)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죄 안의 삶

바울에게 있어서 죄는 인격적인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대적이며 인격적인 하나님으로부터 이탈이다_골1;21) 모든 사람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죄 안에” 있다는 것은 자발적인 죄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죄의 아래 두셨으며

이 죄는 인간을 지배하며 죄는 그들의 마음,(롬1;21), 의지(롬7;15-20)그리고 몸(롬7;24)을 지배한다.

 

(2) 그리스도 안에 있는 피조물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시키셨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온 세상 인간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떠난 세상 ,

하나님께서 계속 사랑하신 세상,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신 세상.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목케 된 세상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고 고백하며 또한 생명의 주로 섬기는 곳에는 어디서나 새로운 것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화목이 선포되고 화목의 삶을 살고 있는 공동체의 참된 지체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리우는 역사내의 새로운 운동의 한 부분임을 암시하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면 그는 그 표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언제나 공동체 안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화목을 통한 새로운 피조물의 실존이다.

 

(3)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

바울이 새로운 상황을 ‘성령님의 법’에 의하여 주도되는 것으로 묘사할 때 새로운 상황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행사되는 역사적 현장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성령님의 법”은 “죄의 법”이 옛 상황을 지배했듯이 새로운 상황을 지배한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님의 법”은 우리를 해방시켰다.

성령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성령님은 율법과 죄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성취할 수 있게 해 주신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는 우리를 도덕법에 순종하지 않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신 그분 아래 있으면 성령님으로써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령님 안에서 섬길 수 있도록 정죄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거룩함과 생명의 성령님이 지배하는 능력과 인도하는 규범이 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창조적이며 생명을 부여하며, 생명을 규정하는 활동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주권을 행사하시는 방식이며, 사랑과 화평과 확신의 방식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롬8;39)에 의해서 보호를 받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이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4)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와 아담은 인류의 두 상충되는 역사의 시작을 각각 대표한다.

바울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만큼 사람들이 “아담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의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고”(고전;15;22) 우리는 “아담 안에서 ” 죽고 “그리스도 안에” 산다.

우리는 옛, 죄로 가득 찬 인성에 속한 사람들로서 “아담 안에”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새롭게 용서함을 받은 인성에 속한 사람들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

 

(5)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심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3-4)

이제 그리스도 안의 선택이 창세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로 주위를 돌려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도 선택을 받으셨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대속을 위해서 죽임을 당하도록 선택된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벧1;20)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의 대상이였던 것이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아 택하였나니”(암3;2)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선택의 정점이셨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이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은 창조된다.

그리고 우리는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았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은 천국을 의미하며 그리스도를 떠난 자들은 선택은 지옥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값없는 아가페적 결정으로 말미암은 선택이 그리스도와의 우리의 연합에 대해서 말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의 성령의 능력 안에 밀려들어온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에서 시작되어 만물이 화목케 될 새 땅에서 정점을 이룰 새로운 질서가 현재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신을 사람들과 동반자가 되게 하고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되며 자신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시게 될 상황을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 안에 뿌리를 박고 있음을 말해준다.

 

요약

우리는 이제까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을 통해 의미하는 바를 찾고자 하는 길고도 힘든 여정을 걸어 왔다.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라고 말할 때 염두에 두었던 준거틀을 제시하기에 충분한 정도를 살펴보았다,

그 준거틀은 역사이다.

인간을 위한 새로운 역사적 상황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갈보리에서 시작되었으며 장차 임할 “새로운 땅”에서 정점에 이를 그 상황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우선적으로 주관적, 도덕적인 체험이나 신비적인 체험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끊임 없는 혼란 가운데 나타난 근본적으로 새로운 상황 내의 존재임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본 장에서 논의된 주요 개념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를 이해함에 있어서 중심적인 것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새로운 질서의 일원으로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새로운 운명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할 안에서였다.

 

? 그 새로운 상황은, 지상에서 주로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이신, 다스리시고 자유케 하시는 성령으로부터 그 성격과 양식을 취한다. 이것이 “성령 안에” 있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동일한 이유이다.

 

? 그 새로운 상황은 모든 차원의 삶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인 까닭에 “새 창조”라고 불리울 수 있다. 그 새 창조는 때가 찰 때에야 완성될 것이기는 하지만, 주의 영이 존재하시며 삶의 전반에 걸쳐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새 창조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통일은 “아담 안의” 그들의 통일과 유비가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아담 두 사람이 그들의 결정과 행위를 통해서 삶의 질서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 밖의” 삶은 “육신 안에”, “율법 아래”,그리고 “죄안에” 있는 삶이다. “육신”, “죄”라는 단어들은 악의 도덕적이며 영적인 영향력 아래 있는 전 역사를 결정 (結晶) 한다. 그것들이 그리스도 밖의 역사적 질서의 전 원동력(dynamic)을 대표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전체적인 새로운 질서를 대표한다.

 

?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재창조하려는 하나님의 결정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새 창조를 세우고, 다스리며, 실현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주만큼이나 광대한 계획의 한부분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새 창조는 단순히 개인들의 새롭게 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다루고 있는 친숙한 본문은, 우리가 회심하였을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선전하는 표어로 너무도 쉽게 둔갑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새 창조 계획은 나의 영혼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제한되기에는 너무도 광대하고도 포괄적인 것이다. 역사의 어떠한 작은 구석이나 틈도 그 목적 안에 포함되며, 어떠한 거대한 문화적 가능성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움직임, 즉 만물이 바르게 되고 그분께서 만물 가운데 충만한 이가 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굴러가는 움직임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